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여배우 중에서도 오드리 헵번은 절대 타락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연약한 성인(聖人)이며, 다치기 쉬워 보이나 또한 섬세한 우아함까지 지녔다. 여려 보이지만 결코 압력에 짓눌려서 무너지는 법이 없었고 연기생할에서 은퇴하여 유니세프의 어린이를 위한 대사가 되었을 때(그때는 아직 유명인들의 자선 활동이 유행하기 전이다) 얼마나 확고한 몰두와 헌신으로 그 일을 해내었던지 완고하고 무감각한 정치인들에게까지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국제적 외교사절이라는 직업은 그녀의 인생과 연기 경력의 논리적인 완결이었다.
헵번은 진정한 세계주의자의 원형이었다. 브뤼셀에서 네덜란드인과 영국의 아일랜드인 부부(어머니는 여남작이었고 아버지는 은행가였다) 사이에 태어난 그녀는 벨기에와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자랐고 2차 대전 동안 나치 점령 하에서 지냈다. 나치 치하에서 너무나 심한 고난을 목격했기 때문에 「안네의 일기(1959)」의 캐스팅 제안을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후에 그녀가 거식증으로 고생한 것도 전쟁 동안 겪은 영양실조 때문이라는 주장도 종종 있었다. 언젠가 그녀는 전쟁 동안 튤립 구근을 먹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헵번은 암스테르담에서 모델로 활동하다가 파리와 런던에서 단역들을 맡으며 연기 생활을 시작했고(가장 눈에 띄는 출연작은 「라벤더 힐 몹(1951)」), 그러다가 1953년에 로마에서 로케이션 촬영으로 만든 윌리엄 와일러의 「로마의 휴일」에 공주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로마의 휴일」은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유럽의 몇몇 도시들에서의 그녀의 멋진 모습을 담은 화면들을 포함시키면서 그녀의 코스모폴리탄적 배경을 잘 활용했고 영화가 끝날 무렵 그녀는 기자 회견 장면에서 네덜란드어로 몇 마디를 말하면서 그녀의 뿌리가 유럽에 있음을 멋지게 드러냈다(헵번은 다섯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이 재능은 후에 그녀의 인도적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로마의 휴일」의 성공은 헵번을 순식간에 세계무대로 도약하게 했고 겨우 스물네 살의 그녀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곧 1954년에는 「운디네」로 토니상(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까지 받았다. 나날이 커져가는 그녀의 명성은 베이비붐 세대 여성들의 변치 않는 사랑을 받았고 그들은 그녀를 현대적인 젊은 여성의 역할 모델로 삼았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와 영국의 언론들은 서로 헵번이 자신들에게 속한다고 주장하려 애썼지만, 이제 그녀가 전 세계에 속한 사람이란 것은 분명해져 있었다.
이후 헵번의 영화 경력은 길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집중적이지도 않았지만—그녀는 1953년부터 1967년 사이에 겨우 15가지의 주요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일관성을 지니고 있어서 영화계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통일성을 구축하고 있다. 헵번이 영화에서 연기한 역할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교육과 관련된 것이었다. 「로마의 휴일」에서도 그녀가 여유로운 기분전환을 위해 엄격한 교육에서 달아난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상대역 그레고리 펙이 여전히 그녀에게 세상의 방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와 유사하게 그녀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들인 「사브리나(1954)」와 「파계(1959)」, 「아이의 시간(1961)」,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그리고 「마이 페어 레이디(1964)」를 보면 그녀가 연기한 인물들의 매력이 언제나 교육과 노력과 적절한 예의범절과 관련되어 있음이 강조된다. 헵번이 모든 교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라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할리우드 스타에서 국제적인 외교사절로
1958년에 그녀는 자신이 브로드웨이에서 그 인물을 창조해 내는 데 일조했던 「지지」의 영화판 주연 캐스팅을 거절했다(그 역은 프랑스 태생의 여배우 레슬리 카론에게 갔다). 1960년대 후반부터 헵번은 점점 연기에서 멀어져 국제적인 외교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니세프와 함께 활동했다.
그 일을 얼마나 유능하게 해내고 또 그로 인해 큰 존경을 받았는지, 그녀가 (1993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화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혼은 그대 곁에(1989)」에서 신의 역을 연기한 것이 전혀 젠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녀는 진짜 천사처럼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위트와 매력으로써 그 역할을 연기해 냈다. 이 깜찍한 여배우는 두 번 결혼했다. 배우 멜 페러와 닥터 안드레아 도티가 그 상대였고 그들에게서 각각 아들 한 명씩을 낳았다. 1990년에 튤립의 한 품종이 그녀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앙증맞은 검은 드레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홀리 고라이틀리는 그 드레스를 입고 뉴욕의 택시에서 우아하게 내려 티파니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종이봉투에 담긴 아침을 먹는다. 2006년 12월, 헵번이 입었던 바로 그 작은 드레스(오른쪽)는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41만 파운드에 팔려, 영화에서 입었던 드레스 중 가장 비싼 그리고 가장 유명한 드레스가 되었다.
지방시가 디자인한 그 드레스는 영원한 스타일의 아이콘으로서 헵번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헵번은 패션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의 뮤즈였다. 그는 「사브리나」와 「퍼니 페이스」, 「샤레이드」, 「백만 달러의 사랑」 등 헵번의 가장 유명한 영화에서 그녀의 의상을 담당했다. 사이즈 6의 바닥까지 끌리는 검정 칵테일 드레스는 몸에 딱 맞는 몸통 부분과 등이 깊이 파이고 허벅지까지 트임이 있다. 헵번의 진정한 박애활동을 생각해보면 그 드레스의 판매액이 인도의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단체인 시티 오브 조이 에이드에 보내진 것은 아주 적절한 일이다.
항상 겸손했던 헵번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외양은 쉽게 따라할 수 있어요. 여자들이라면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사서 쓰고 작은 민소매 드레스만 입으면 오드리 헵번처럼 보일 수 있답니다." 그녀의 첫 번째 히트 영화 「로마의 휴일(1953)」 이후 전 세계 수백만의 여성들은 헵번처럼 보이고 싶어 했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내가 이런 얼굴을 가지고 영화에 출연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습니다."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501 영화배우, 2008. 8. 29., 스티븐 제이 슈나이더, 정지인)